2016년 1월 17일

영어의 역사

English

인도•유럽조어

5000년 쯤 전에, 중앙 유럽 어딘가에서, 인간 한 부족이 살았다. 그 때에는 많은 부족이 곳곳에서 살았고, 부족마다 제 언어로 말했다. 화자가 가장 많은 언어는 뻗고 느는 것에 가장 선곡한 부족의 언어였다.

자연에서는, 오래 사는 동물 종류는 제 환경에 제일 적응하는 종류이다. 예컨대 눈으로 덮인 동토대에서 곰 두마리, 흰 털 한마리와 검은 털 한마리가 산다하면, 털이 흰 곰은 눈 빚깔과 잘 어울려서 살아가는 가망이 높다. 먹이는 곰이 닥치는 것을 안 보기 때문이다.

인간도 그렇다. 잘 살아가고, 뻗고, 늘어가는 무리는 제 환경에 적응하는 무리이다. 불행히도 인간 무리가 만날 때, 전쟁이 자주 환경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적응”하는 무리는 잘 싸우는 무리이다.

5000년 쯤 전에, 이 중앙 유럽 부족은 되게 잘 싸웠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인간은 칼, 창 같은 무기를 발명했었지만, 이 부족은 근처에 사는 아무 부족도 안 가지는 두 기술을 가졌다. 말이랑 바퀴였다. 말도 기술이냐해도, 말을 길들이는 것은 아무 부족이나 해낸 기능이었다. 그리고 바퀴는 수레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말 한마리를 수레 한 대에 매기만하면 전쟁용 마차를 가지게 된다. 5000년 전에는 마차를 가지면 무역이 되는 것이다.

중앙 유럽 부족은 유목민이었다. 농경을 아직 발견 안 했기에 동물을 사냥하는 것으로 먹이를 받았다. 동물이 이동할 때마다 부족도 이동했다. 그래서 유럽을 건너서 뻗으면서, 다른 부족을 만날 때 싸웠다. 전쟁용 마차 덕분에 중앙 유럽 부족은 거의 항상 이겼다. 그래서 되게 멀리 뻗어 갔다. 일부는 현대 인도까지 갔다. 부족이 때륙을 건너서 뻗으면서, 제 언어도 뻗었다. 이 언어는 오늘 유럽과 인도에서 쓰이는 모든 언어의 조상이니까, 인도•유럽조어라고 부른다.

결국 인도•유럽 초(超)부족은 뻗으면서 다른 속족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현대 이탈리아에서 살고, 또 하나는 현대 그리스에서 살고, 또 하나는 브리튼 섬에서 살게 등 되었다. 아(亞)부족은 흩뜨려저서 서로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어지고, 한동안 있다가, 아부족마다 인도•유럽어를 제대로 말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현대 그리스에서 사는 아부족은 그리스 사투리처럼 생각해도 좋은 독특한 인도•유럽어를 썼다. 시간이 흘리면서 인도•유럽어의 “그리스 사투리”는 “이탈리아 사투리”와 너무 달라져서, 두 말은 같은 언어의 두 방언만 말고, 완전 다른 두 언어였다.

사실로, “그리스 사투리”와 “이탈리아 사투리”를 하는 아부족들은 고대 서양의 최대 두 문화가 됐다. 농법을 알게 되며 지중해 가까이에 정착했고, 서로 또는 북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민족들과 무역을 많이하고, 나중에 북 아프리카로부터 매우 유용한 기술을 수입했다. 글자였다. 북 아프리카 문자의 별형을 써서, 이 두 인도•유럽 아부족은 자기 언어로 많은 문헌을 지었다. 그 언어와 그리스어와 라틴어, 오늘날까지 공부하는 만큼 역사에 중요한 언어들이다. 라틴어는 로마 제국의 국어였고 되게 많은 영단어의 근원이다.

영어의 탄생

인도•유럽인 아부족 중에는 게르만 아부족도 있었다. 있다가 이 아부족은 또 세 방언으로, 즉 동게르만어, 북게르만어와 서게르만어로 갈라졌다.

동게르만인은 고트인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들의 언어는 고트어였다. 이 언어는 더 이상 안 쓰며 글도 별로 안 남지만, 고트인은 로마 제국의 서부를 정복하는 것으로 역사 상 중요하게 되었다. 그 승리 다음에 자기의 나라를 만드는 것 대신에, 몇몇 무리로 갈라지고 점차 몇 가지 나오는 새 나라에 흡수되었다.

북게르만인은 우리가 바이킹이라 부르는 해상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자기를 Norsemen(“북 사람”)이라 부르며, 그들이 쓴 고대 노르드어가 있다가, 중북 유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오늘날까지 쓰이는 몇 가지 언어로 갈라졌다. 그 언어 중 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와 아이슬란드어가 있다. 바이킹 무리 중 하나인 덴마크인이 한동안 영국의 북동 지역을 정복했으니까 덴마크어는 영어의 역사 상 중요한 언어이다.

서게르만인은 현대 독일 근처 중서 유럽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몇 방향으로도 뻗었다. 한 무리는 현대 독일에 남았고, 자손이 독일어를 한다. 또 한 무리는 바다의 가까이에 갔고, 자손이 네덜란드어를 한다. 서게르만어를 하는 세 부족이 유럽 본토에서 브리튼 섬까지 건넜다. 앵글인, 색슨인 그리고 주트인이었다.

앵글인은 태어난 나라의 모양에서부터 이름을 지었다. 낚싯바늘처럼 생겼다. 앵글인은 특별히 잘 낚시한 것이 아닌데, 낚시는 음식의 근원 중 하나라 낚싯바늘을 뜻하는 낱말을 가졌다: angle. 오늘도 영어에서는 그 낱말을 쓴다. Angle for a compliment (칭찬을 낚시) 할 때 칭찬을 받고자 간접적으로 물어보고, angler가 돈을 받기 위하지 않고 재미있어서 낚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앵글인은 “낚싯바늘의 사람”, 곧 낚싯바늘처럼 생긴 곳에서 온 사람이었다.

색슨인도 쇠붙이에서부터 이름을 지었다. “색스”는 쓰는 것으로 유명한 칼 일종을 그들이 부른 낱말이다. 손응 지키는 부분이 없는 작은 검처럼 생겼다. 색슨인은 “칼의 사람”이었다.

주트는 어디에서 이름을 지었는지, 정확히 누구였는지가 덜 알려 있다. 적은 글 밖에 안 남겼고, 남이 쓴 그들에 대한 글도 적다. 그런데 앵글인과 색슨인이랑 본토에서 브리튼 섬으로 간 것 정도 안다.

이 세 서게르만 부족은 브리튼 섬에 도착했을 때, 벌써 저기에 사는 사람을 만났다. 켈트라는, 오래 전에 유럽에서 물을 건너 온 인도•유럽 아부족이었다. 켈트 무리 중 하나가 자기를 브레톤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에서 “브리튼”, “브리티쉬”란 말이 온다. 켈트인은 전사라 알려 있었는데, 침입해 온 사람만큼은 안 강했다.

그전에, 로마 제국 육군이 브리튼 섬을 침입해 식민지로 했었다. 인간 한 무리가 다른 한 무리를 정복할 때, 자주 진 무리가 이긴 무리의 언어를 쓰게 되고 자기 언어가 죽는다. 켈트인은 안 그랬다. 로마인 정복자의 라틴어를 안 잗아들이지 않고 자기 언어들을 계속 쓰고 있었다. 로마인이 마침네 브리튼 식민지를 포기해 켈트인을 또 마음 대로 하게 한 다음에, 그 지역에는 몇 개 밖에 라틴어 낱말이 안 남았다. 켈트인의 개성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러나 켈크인은 독립을 오래 즐기지 못 했다. 로마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침입을 받았다. 이번은 중서 유럽에서 온 앵글인, 색슨인이랑 주트인이었다. 주트인은 동남 브리튼에 정착한 체 그대로 남았지만, 앵글인과 색슨인은 사나웠다. 켈트인을 브리튼 섬 중분에서 스코틀랜드 섬, 아일랜드 섬, 콘월 등 북부와 서부 변두리에 물리쳤다. 그 곳곳에서 켈트인의 자손이 아직 살고 있다. 아일랜드어나 웨일즈어 등 그들의 언어는 화자가 많지는 않은데 여전히 자존심 있게 잇는다.

앵글인과 색슨인은 브리튼 섬 대부분까지 뻗었다. 두 부족이 더 자주 서로 만나면서, 전에 한 서게르만엉로부터 갈라진 두 언어가 다시 합치게 되었다. 소위 앵글로•색슨어가 브리튼 섬 어디에서나 쓰여 있었다. 다른 데에서 다른 모양으로 쓰여 있었는데, 이 다양함에 불고하고, 아직 한 언어였다. 색슨인, 특별히 브리튼의 서부에서 산 색슨인이 앵글인보다 힘세어서 그 언어는 “앵글로”보다 더 “색슨”의 특유를 가졌다. 하지만 앵글로•색슨어가 더 짧은 이름으로 불리게 됐을 때, 그 이름은 색슨인 말고 앵글인에서부터 왔다. 브리튼 섬 어디에서나 쓰이는 언어는 “앵글리쉬”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늘 “인글리쉬”, 곧 영어라고 부른다.

오늘의 영어는 중서 유럽에 있는 낚싯바늘처럼 생긴 곳에서 태어난 서게르만인 한 부족으로부터 이름을 졌다. 그런데 앵글인이 쓰는 모양과는 많이 바뀌어 왔다. 먼저 색슨인이 자기의 언어를 붙이고 앵글로•색슨어로 했다. 기원후 450년—1150년 사이에 쓰였던 언어는 오늘 “고대 영어”라 부르는 언어이다.

“고대 언어”란 쉐이크스피어나 흠정역 성서의 영어를 가리키지 않을까 할 수도 있다. 물론, theethou이 많이 나오는 그 언어는 우리가 아는 영어보다 훨씬 늙은 모양의 영어이다. 하지만 고대 영어는 아니다. 쉐이크스피어나 흠정역 성서의 영어는 사실로 초기 근대 영어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근대 영어이다. 고대 언어란 앵글인과 색슨인이 쓰이던 언어이다. 서사시「베어울프」의 한 발췌가 아래와 같다.

Hwæt, we gar-dena in geardagum
þeodcyninga þrym gefrunon,
hu ða æþelingas ellen fremedon!

“그건 영어 아니잖아!”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틀림 없이 영어이다. 그 발췌는 오날 이해하기 힘든데 두 낱말, 즉 wein이 그대로 근대 영어에 나오며, 하나 더 hu가 근대 영어 how를 매우 닮는다. 그래도 우리가 익힌 영어와 꽤 다르다. 전체적으로 고대 영어를 영어보다 독일을 닮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리가 없다. 고대 영어는 바로 서게르만인 부족인 앵글인과 색슨인의 영어이었다. 그리고 근대 영어에 안 나오는 글자 두 개 þð이 고대 영어에 나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글자는 thorn(손) 및 eth(에스)라고 하고, 둘 다 우리말에 없는 영어의 th 소리를 쓰기 위해 쓰였다. 영어는 더 이상 그 두 글자를 안 쓰는데, 아이슬란드어 등 다른 게르만 어구의 몇 가지의 언어는 아직 쓴다.

그리 독일을 닮던 영어는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가? 몇 가지 큰 일이 영어를 오늘날 쓰는 모양으로 바꾸는 것을 도와 왔다. 바로 바이킹 침입, 노르만인 침입, 대모음 추이 및 론돈 인쇄업이었다. 윌리엄이라는 남자 세 명이 이 일들에 특별히 중요했다. 언어적 바꿈의 자취를 세 시기를 걸치고 쫓을 수 있다. 바로 고대 영어, 중세 영어와 근대 영어이다.

고대 영어

두 서게르만인 민족, 곧 앵글인과 색슨인이 합쳐서 켈트인으로부터 잡은 브리튼 섬에서 새 영국 민족이 됐을 때 고대 영어는 태어났다.

인도•유럽어에서 유래한 서게르만 한 언어라서 고대 영어는 인도•유럽어오 공통점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근대 영어보다 복잡한 언어였다. 인도•유럽어가 근대 언어들보다 복잡했다는 것을 들어서 날랄지도 모르겠다. 자동차, 비행기 따위 우리의 근대 기술은 말, 수레 따위 인도•유럽인의 기술보다 복잡했기 때문에 우리의 근대 언어도 더 복잡하지 않을까? 실로, 언어는 늙을수록 복잡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기술을 여기까지 발전해 올 수 있는 원인 중에, 다른 언어를 하는 다양한 몇 무리가 서로 접촉해 온 것이 있다. 두 다른 언어가 만날 때, 더 복잡한 언어가 덜 복잡한 언어의 수준까지 간단화하는 것은 보통이다. 그래서 두 무리 다 더 잘 서로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볼 것과 같이, 이 현상은 영어의 초기 역사에서 두 번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아주 일찍 언어라서 인도•유럽어는 아주 복작뱄다. 가정 그 언어를 쓰면서 자라 왔더라면 굉장히 많은 문법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다른 구실로 쓸 때 다른 꼴을 한 낱말이 많았다. 정도가 덜하지만 근대 영어도 그렇다. 동사 walk는 세 다른 형태가 있다, 곧 walks, walked, walking. 동사 eat는 더 많은 형태가 있다, 곧 eats, ate, eating, eaten. 영어를 제1 언어로 한 사람이라면 이 형태들을 생각 안 해도 바르게 쓸 수 있지만, 영어를 제2 언어로서 배웠다면 그에 대해서 상당히 복잡한 사실을 배워야 했겠다. Eat는 부정사형, eats는 3인칭 단수 현제 시제형, ate는 과거 시제형, eating은 현제 분사형 겸 동명사형, 그리고 eaten은 과거 분사형. 얼마나 외우기에 힘든 부담일까! 근대 영어 문법은 확실히 복잡하는데, 인도•유럽어 문법은 훨씬 더 복잡했다. 동사는 형태가 더 많고, 동사만 말고 문장 상의 구실에 따라 명사와 형용사까지도 형태가 많았다.

학교에 안 가고 사냥, 전쟁으로 바쁘던 인도•유럽인이 어떻게 그런 복잡한 언어를 배우고 쓸 수 있었는냐고 놀랄 수도 있다. 간결히 대답하면 인도•유럽어가 그들의 모어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조사 “-이/가”나 “-은/는”을 생각 안 해도 구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들으면서 잘랐기 때문에 엄청 다양한 동사와 명사, 형용사 형태를 양립시킬 수 있었다. 간단히 익혔기에 일부러 공부할 필요 없었다. 그렇지만 아마도 인도•유럽인들이 자기 언어를 “바르게” 쓰는 것에 별로 주의 안 한 것은 생각할 만하다. 사냥, 정쟁으로 바빠서 학교가 없었다. 실로 글 쓰는 법마저 없었다. 인도•유럽인은 문자 사용 이전 시기의 민족이라서, 글을 쓰는 것을 발명했기 전에 살았다. 말은 많았는데 말을 적어넣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는지 말지의 수준 밖에는, “바른” 인도•유럽어의 기준도 없었다. 기준 문어가 없는 것은 인도•유럽어를 바꾸기 쉽게 만들었다. 교과서 따위 없어서, 인도•유럽 한 무리가 바르다고 판단하는 한 다발의 표현법을 쓰고, 또 다른 한 무리가 바르다고 판단 하는 또 다른 한 다발의 표현법을 쓸 수가 있었다. 실제로 자주 그랬고, 인도•유럽 아부족들이 서로 떨어진 다음은 각각 언어가 되게 빨리 달라졌다.

게르만인 아부족의 언어는 몇 면으로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등 다른 아부족들의 언어와 달랐다. 시간이 흘러 게르만어 자체가 갈라지면서, 서게르만어와 북게르만어가 꽤 달라졌다. 서게르만어, 그래서 앵글로•색슨어는 고대 인도•유럽어의 복잡함(문장상 구실에 따라 다른 형태 등)을 대부분 보존했다. 예컨대 “왕”을 뜻하는 고대 영어가 cyning이었다. 왕이 문장의 주어였으면, “왕이 법률을 만든다”와 같이, 앵글로•색슨인은 cyning이라 했다. 그리고 왕이 직접 목적어였으면, “우리가 왕을 지켜야 한다”와 같이, 여전히 cyning이었다. 하지만 왕이 간접 목적어(“그들은 왕께 선물을 드렸다”)였으면 cyninge가 되고, 소유(“왕의 성은 강하다”)였으면 cyninges가 되었다. 그 형태들은 오직 단수였다. 두 명의 왕 이상 말했으면 다른 형태(cyningas, cyninga, cyningum)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명사가 cyning과 같은 어미를 쓴 것은 아니다. 다른 명사의 무리를 위해 다른 어미의 무리가 있었다. 그런 현상은 서게르만어군이 계속 복잡함을 보존한 방법 중 하나이다. 근대 독일은 아직 글러한다. 그런데 북게르만어는 상당히 일찍 그러함을 그만두었다. 기년후 8세기까지, 명사 형태의 면으로, 북게르만어군은 서게르만어군보다 많이 간단했다.

8세기에는 북게르만 바이킹 민족인 데인인이 브리튼의 동해안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기독교 수도원을 습격했다. 수도원은 돈이 많고 싸우기보다 쓰기를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다. 몇 번 습격에 성공한 다음에, 데인인은 브리튼의 모조리를 원하게 되었다. 8세기 후반에 군대 가지고 왔고, 모든 앵글로•색슨들을 정복하지는 못했는데 동북 브리튼의 큰 부분을 이기기에는 성공했다. 이 지역은 데인인이 법률을 만들게 돼서 “데인로 (Danelaw)”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대 노르드어 낱말이 앵글로•색슨 언어에가장 일찍 바이킹 습격과 함께 왔다. 영국인은 당시에 바이킹을 바다에서 온 습격자로서 알렸기에, 바이킹에서 빌린 낱말은 대부분 바다 여행과 전쟁에 관한 말이었다. 8세기 전반에는 노르드어 낱말이 영어로 많이 들어 왔는데, 스칸디나비아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게 됐을 때는 데인로을 설립한 후반이다. 새로운 말이 급히 들어오며, 고대 영어는 문법까지 간단화했다. 영국인과 새 데인인 주인의 의사 소통을 쉽게 하기 위해, 명사의 형태를 구실에 따라 바꾸는 서게르만어 체계는 죽어 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명사 형태가 했던 일은 이제 전치사라고 부르는 따로 기능 낱말이 하게 되어 있었다. 이 변경은 고대 영어를 오늘 하는 언어에 좀더 가까이에 가져왔다. 물론 데인인의 연향은 동북 브리튼에서 가장 빠르고 강했지만, 전체의 영어로 뻗어가는 간단화시키는 일을 시칵했다.

데인로는 고대 영어를 죽이지 않았다. 데인인이 브리튼의 일부를 침식했었는데 데인어는 저기에 쓰이던 앵글로•색슨 언어를 대신 안 했다. 그리고 데인로 이외에, 영어는 아직 브리튼의 (켈트인 변두리를 빼고) 어디에서나 쓰여 있었다. 역사가 영어로 쓰였다. 종교 문학도 영어로 쓰였다. 소설도 「베어울프」처럼 시도 영어로 쓰였다. 간단화시키는 충격을 바이킹으로부터 받았음에 불구하고, 고대 영어는 생활력이 차고 번성하는 언어였다.

그래도 바꿈에 면역이 안 되어 있었다. 데인로 밖에도 고대 영국은 한 나라 말고 네 나라라서, “기준 영어” 따위 없었다. 대신에, 몇 가지 방언이 있으며, 단어와 마춤법과 발음 등 방언마다 달랐다. 11세기까지, 차이가 커져서 브리튼의 북부와 남부의 영어 화자가 서로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외냐 하면, 북부에 영향을 미친 데인이 한 원인이면서, 아예 인도•유럽어에서 게르만어를 분기시키고, 게르만어에서 서게르만어를 분기시키고, 결국 서게르만어에서 앵글어와 색슨어를 분기시킨 자연적 다양화시키는 경향도 원인이다. 흥미 있는 것으로, 브리튼의 북부와 남부 사람은 서로 소통하기 힘들었는데, 중부 사람은 북부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있고 남부 사람의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영어가 마침내 기준되었을 때, 기준은 이 중부에서 왔다.

고대 영어(아직 한 언어라고 할 수 있었으면)의 상태가 그랬다 ... 완전 새로운 시기로 밀쳐내는 강타를 받을 때에.

중세 영어

바이킹들은 스칸디나비아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데인로만 정복한 것은 아니다. 브리튼 동해안에서 한 일을, 브리튼에서 물 건너편 프랑스 북해안에서도 했다. 거기서 정착한 스칸디나비아인을 프랑스인이 노르만이라 불러, 정착한 지역을 노르만디라 불렀다. 오늘도 노르만디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하도록 동맹이 유럽을 반침입한 곳임으로 유명하다.

브리튼에서 산 데인과 프랑스에서 산 노르만 간 차이점 중 큰 하나는 얼마큼 자기의 언어에 애착했는지이다. 브리튼의 데인은 하인을 데인어를 하게 안 만들었는데 자기가 영어를 쓰게 되지도 안 했다. 데인과 영국인이 그냥 동존했다. 의사 손통해야 될 때마다 어쨌든 처리해 냈다. 그와 반대해, 노르만은 빨리 자기의 북게르만 언어를 포기하고 새 나라의 프랑스어를 받아들였다.

노르만이 보기에, 프랑스어는 완전 새롭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했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유럽의 그 지역에서 쓰여 온 언어들을 좀 살피겠다. 제일 일찍은 아마 인도•유럽어의 한 종류, 특별히 켈트어의 종류일 수가 높다. 켈트인은 다른 인도•슈럽인 아부족들과 같이 유럽 대륙에서 태어났다. 그 중 몇 무리(Gaels 게일인, Picts 픽트인, Cornish 콘월인, Welsh 웨일스인 등)가 브리튼 섬으로 건넜고, 몇 무리(Gauls 골인)가 본토에 남았다. 골인은 켈트 언어를 하면서 현대 프랑스에서 살았다, 로마 제국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들을 정복하고 로마 식민으로 했기까지. 라틴어가 빨리 골인의 켈트 언어를 내밀었다. 한동안, 여기서 쓰이는 라틴어는 제국의 어디서나 쓰이는 라틴어와 비슷했지만, 제국이 서부와 동부로 갈라져 수도가 동부로 이동한 다음에, 중심 권력이 없어서 서부 로마인은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라틴어 방언를 하게 되었다. 라틴어 방언은 다 간단화했는데, 현대 프랑스에서 쓰이던 방언은 훨씬 더 빨리 간단화했다. 원인 중 프랑크족을 만난 것이 있었다. 프랑크족은 서게르만 부족이며, 로마 제국이 동쪽으로 조첨을 이동한 것을 서부에서 자기를 위한 왕국을 짓는 기회로 보았다. 410년에 고트인이 로마를 무너뜨리므로 약화한 서로마 제국을 주겨 낸 순간에, 프랑크족이 왕국을 짓기를 방해하는 요소도 없애 주었다. 프랑크족이 프란키아라고 부르던 왕국은 우리가 프랑스라고 부른다. 그들이 자기가 쓰는 서게르만 언어를 Frankish(프랑키쉬)라고 부른다. 프랑키쉬는 지역의 라틴어를 엄청 많이 빨아들여서 게르만 언어보다 이탤릭 어파의 한 언어가 되었다. 그 언어는 바로 French(프랑스어)이다. 8세기에 노르만 사람이 왔을 때 프랑스에 살던 사람이 쓰던 언어는 이 프랑스어이다. 프랑스어는 지금 대부분 라틴어이라는 의미로, 북게르만 노르만들이 보기에 퍽 낯설었을 것이지만, 그 프랑스어의 중심이 서게르만어라는 의미로, 완전 낯설었지 않았을 수도 있다.

노르만 사람은 프랑스어를 어떻게 생각했든, 빨리 배우고 자기 언어를 잊었다. 하지만 언어적 독립를 포기하자마자 좀 되찾기 시작했다. 10~11세기의 프랑스어는 두 방언이 있었다, 곧 남부에 있는 파리에서 쓰이는 주된 프랑스어와 북부에서 쓰이는 분파 바이킹 프랑서어. 노르만 사람은 9세기의 프랑스어를 제법 잘 했는데, 프랑스어가 발전해 가면서 남부에서 바름이 바뀌어도 노르만 프랑스어는 안 바뀌었다. 예를 들어서, 라틴어 campus(“들”)가 9세기 프랑스어에서는 camp였고, ca-cha-로 바꾸는 인기 있는 나무 경향에 따라, 남부에서 champ가 되었다. 그런데 노르만 사람은 여전히 camp라고 해서, 있다가 영국으로 갔을 때 그 낱말을 이 꼴로 가져갔다. 혹시 노르만 사람은 프랑스어를 잘 하게 된 것을 자랑해서 그 언어의 타락에 참여 안 하고 싶어 했을지 모르겠다. 얄궂게도 오늘의 남부 프랑스인이 품는 태도이다.

11세기까지 네 앵글로•색슨 왕국은 한 나라로 동일되어 있었다. 1066년에 윌리엄이란 노르만 군주가 영국의 왕위가 제 것일 줄 알며 영국으로 군대를 이끌고 이겼다. 이 일은 그외의 아무 일보다도 영어를 바꾸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 사회는 두 층으로 나눠 있었다. 하층은 영국인, 상층은 프랑스인. 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층은 영어, 상층은 프랑스어. 프랑스어는 더욱더 널리 쓰이고 영어는 더욱더 안 쓰이게 되었다. 영국인 아이달이 학교에서 공부한 언어는 모어인 영어 아니라, 바로 프랑스어이다. 프랑스의 치세가 영어를 그리 무겁게 누르니, 영어는 죽어 버리지 않을까 보였다.

고마운 일로, 안 그랬다. 영어는 죽지는 않았지만 많이 바뀌었다. 명확히 말하면 프랑스어와 가까워졌다. 프랑스어에서 엄청 많은 낱말을 받아드린 것만 말고, 문법까지 프랑스어 문법을 닮게 바뀌었다. 꽤 간단해졌다. 구실을 보여주는 명사나 형용사 어미의 체계는 북부에서 바이킹의 영향을 받으므로 벌써 약화되어, 이제 브리튼 섬의 어디에서나 사라졌다. 프랑스어 동사는 오래 전에 어미를 잃었기에, 이제 영어 동사도 대부분의 어미를 잃었다. 시까지도 바뀌었다. 고대 영어에서는 시의 일행에 네 강음이 있었고 그 중 둘이나 셋이 같은 자음에서 시작했었다. 고대 영어 낱말은 다 첫 음절을 강음했으니까 자연스러운 규칙이었다. 하지만 중세 영어 시는 일행에 다섯 강음이었고, 각 강조된 음절 직전에 강조 안 된 음절이 있었다. 이 규칙은 모든 낱말의 마지막 음절을 강조하는 프랑스어에 더 어울렸다. 시까지 바뀐 것은 얼마나 중세 영어가 프랑스어을 닮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노르만 정복 이후 오랫동안, 영어에서는 글이 별로 안 쓰였다. 앵글로•색손들이 매년 썼던 역사도 라틴어로 쓰이게 되고, 그 밖에 모두가 프랑스어로 쓰였다. 프랑스어가 그때 브리튼에서 주된 언어이니까 영국인이라도,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될수록 프랑스어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있다가 영어 문학은 돌아왔다. 노르만 사람이 아직 영국을 통치했는데, 그들의 앵글로•프랑스어과 함께 덜 중요하게 되면서, 영국인과 중세 영어가 사회적으로 오를 기회를 만들었다. 영어와 다시 책에 나와 있었는데, 얼마나 다른 영어였는가!

우리가 본 것과 같이, 정복 전에 영국인은 다양한 방언을 썼었다. 같은 영어를 하면서 다른 방언을 쓰는 사람이 이해 못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영어 문학은 거의 다 앵글로•색슨 왕국 중 제일 힘있는 나라 웨섹스의 웨스트 색슨어로 쓰여 있었다. 그래서 영어는 한 언어처럼 안 들려도, 확실히 한 언어처럼 보였다.

노르만 사람이 온 다음에, 영어 문학은 수백년간 잠들었다. 이러났을 때 처음 들린 것과 같이 보였다. 영국의 일부의 책은 다른 일부의 책과 다른 낱말과 모양을 썼다.

아무리 달라도, 중세 영어 책은 공통점이 몇 가지 있었다. 고대 영어의 웨스트 색슨 방언이 썼던 동사와 명사, 형용사 어미가 없었다. 글자 þ 및 ð는 프랑스어 맞춤법 th로 바뀌어 있었다. 중세 영어의 몇 방언들은 고대 웨스트 색슨어를 닮기보다 서로 닮고 어떤 면으로 프랑스어를 닮았다. 노르만 영국이 다시 영국다워질수록 방언들도 나아갔다. 그리고 나아갈수록 서로 가까워졌다.

앵글로•노르만 프랑스어가 중요성을 잃은 이유 중, 다른 프랑스인 남부, 특히 파리에서 쓰이는 종류가 더 중요해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남중 영국, 특히 론돈에서 쓰이는 영어가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중세 영어 방언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하면, 론돈 영어가 이기고 있었다. 중세 영어 시기에 론돈 영어의 제일 승리는 The Canterbury Tales(「캔터베리 이야기」)였다. 14시기 말에 론돈에서 산 제프리 초서가 지은 이야기와 시를 모은 책이었다. 이전의 아무 책보다도 「캔터베리 이야기」는 무식꾼 언어로 삼던 영어가 프랑스어나 라틴어만큼 존경할 만한 문학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기를 휩쓴 책을 출반한 것으로 론돈 방언은 근대 영어로의 경기에서 다른 방언들을 능가했다. 사실로 「캔터베리 이야기」는 지금 읽어 보면 줄거리를 대개 이해할 수 있는 정도 형대 영어와 가깝다. 「베오울프」를 읽어 보면 차이를 느낄 것이다.

물론 아직 많이 바꿔어야 근대 영어가 될 것이었다. 초서가 론돈과 영어를 세계 문학의 지도에 올렸었는데, 의논의 여지가 없는 영어 글의 왕은 앞으로 올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문학적 정복에 어울렸다. 윌리엄이었다.

근대 영어

1476년에 윌리엄 캑스턴이 론돈에서 가게를 개업했다. 아니, 그는 역어 글의 왕이 아니었는데, 전의 아무 영국인보다 더 많은 글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의 가게 안에는 영국의 첫 인쇠기가 있었다.

25년 쯤 전에, 구텐베르크라는 독일인이 첫 인쇠기를 만들었었다. 그전에는 책을 베끼려면 모조리 손으로 써야 했다. 글자에서 글자까지, 낱말에서 낱말까지, 페이지에서 페이지까지. 베끼기에 걸리던 시간과 기능 때문에, 책은 드물고 비쌌었다. 인쇠기는 일기와 쓰기에 혁신을 행했다. 꿈에도 책을 사거나 읽는 법을 배우고자 안 하던 사람이라도 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캑스턴의 인쇠소는 론돈에 있어서 영어로 쓰는 사람이 론돈에 떼지어 모였다. 영어 책 대부분은 거기서 인쇠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가장 널리 읽어진 책은 론돈 방언을 하는 사람이 지은 책이었다. 오늘날 온 세상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캘리포니아 영어를 듣는 것과 같이, 16시기에는 온 영국이 론돈 영어를 읽었다.

근대 영어로의 돌격을 이끌고 있는 언어는 론돈 영어였다. 이전에 남부보다 데인인의 영향을 받은 북부에서 문법적 어미가 낱말에서 떨어졌지만, 16시기까지 간단화는 제일 빠른 곳은 론돈이다. 그 이유는 몇 가지 있다. 론돈은 영국의 상업 중심이 되어서 다른 도시보다 외국어를 더 자주 접촉했다. 그런데 론돈에 있는 주된 근대화시키는 요소는 캑스턴 자신이었다. 인쇠기 전에는 사람들이 말을 적을 때 듣는 대로 철자하니 똑같은 낱말이 몇 가지 다른 철자로 적을 수 있었다. 하지만 캑스턴은 영어 맞춤법에 일관성을 주고자 많은 새 기준을 혼자서 만들어야 했다. 1604년에 첫 영어 사전이 출판되는 것은 초서보다 오늘과 가까운 맞춤법을 설립하는 것을 도왔다.

그런데 영어의 새로운 낯은 옛 낯을 완전히 대신하는 것은, 한 사람이 그 낯을 잊을 수 없게 팔아주지 않았더라면 없었지도 모른다. 그는 셋째 윌리엄, 곧 쉐익스피어였다.

쉐익스피어를 첫 번째나 두 번째 학교에서 읽을 때—우리가 모두 겪은 경험—쉐익스피어가 영어에서 잡은 자리를 이해하기가 힘들 수 있다. “이건 못 읽잖아”고 생각한다, “고대 영어라서.” 물론 틀린다. 「베어울프」는 고대 영어이다. 고대 영어를 외국어로서 안 배우면 「베어울프」 따위 진짜 못 읽는다. 쉐익스피어의 영어는 중세 영어도 아니다. 초서는 중세 영어라서 「캔터베리 이야기」도 쉽게 못 읽는다. 그러나 쉐익스피어의 언어는 우리 영어이다. 낱말이 다를 때(우리가 “coward”라고 하는 바에 그가 “poltroon”이라고 한다)가 많고 어순도 자주 다르지만, 언어 자체는 우리가 아직 쓰고 있는 영어이다. 책을 직접 보고 읽을 수 있다. 쉐익스피어의 글이 이상히 들리면은, 시이고 시가 낯설기 때문이지, 다른 언어이기 때문 아니다. 틀림 없이 우리 영어이다.

쉐익스피어가 지은 국은 영어 문학 중 제일 알려 있고 제일 사랑받는 작품이다. 영어가 프랑스어로주터 받으나 그때까지 완전 영어의 일부되어 버린 다섯 강조 운율에 따라 썼다. 많은 유명한 소네트(14행시)도 지었다. 소켓은 영어가 이탈리아로부터 받은 시의 일종이다. 쉐익스피어가 얼마큼 소네트 달인이었는지를, 자기의 소네트 꼴 “쉐익스피어 풍 소네트”가 그냥 “영어풍 소네트”라고도 부르는 것은 보여준다. 이탈리아 식 원형, 이탈리아인 시인 페트라르카로부터 이름을 받은 “페트라르카 풍”으로도 소네트를 지을 수 있는데, 영어 독자가 보기에는 “영어 소네트 = 쉐익스피어 풍 소네트.” 쉐익스피어는 그런 그늘을 영어 문학, 그리고 세상 시에 비친다. 쉐익스피어를 아는 것, 즉 그의 줄거리, 원래 그가 지은 것 아닌 줄거리를 애매하게 기억하는 것말고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보고 이해하는 것은, 영어 회지가 공유하는 문화의 부가결한 일부이다. 쉐익스피어를 무시하는 것은 영어를 불완전히 밖에 모르는 것이다.

쉐익스피어의 작품 외에, 출판됨을 때 여러분이 읽었고 오늘도 사람들이 읽는 책으로 흠정 영역 성서이다.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중 하나요 15세기에 영국 생활의 중요한 일부였다. 오늘날, 새 국제판 성경 등 후기 근대 영역을 읽는 그리수천들도 흠정 영역을 어느정도 안다.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y thy name…” 쉐익스피어와 흠정 영역 성경 덕분에 thee, thou, thy 등 대명사와 -est, -eth 동사 어미가 낯익다. 대부분의 사람이 바른 용법을 잊어 버렸음에도 불구 하고. 작자가 옛 말투 하고 싶을 때 이런 초기 근대 영어 낱말을 무차별히 넣는다. “What thinkest thou?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대신에 “What thinketh thee? (‘너는’이나 ‘네가’ 대신에 ‘너를’을 무리로 주어로 하고, 2인칭 대신에 3인칭 동사와 무리로 이은 어법)” 같은 오류를 흔히 볼 수 있다. 오늘 작자가 이런 옛 말에대해 무식할지라도, 아직 쓰고자하는 것 자체가 초기 근대 영어의 오랜 영향을 보여진다.

「캔터베리 이야기」를 흠정 영역 성경의 한 장과 비교하면, 초기 근대 영어가 중세 영어와 얼마나 달라졌는지가 명백할 것이다. 그래도 가장 큰 차이점은 페이지에서는 보지 못한다. 귀로 들어야 알 것이다. 영어를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널리 뻗은 소리가 바뀌는 현상이었다. 대모음 추이였다. 좀이라도 스페인어나 프랑스어를 재워 본 적이 있으면, 그 언어들의 모음(a, e, i, o, u)이 영어의 장모음과 달리 발음됨을 안다. 영어 ā는 본토 유럽 언어들 ei처럼 들린다. 영어 ē는 그들 i처럼, 영어 ī는 그들 ai처럼 영어 ō는 그들 o처럼 들리는데, 영어 ū는 그들 yu처럼. 외 이런가? 스페인어, 프랑스어 및 이탈리아어가 이상한가, 아니면 영어가 이상한가? 정딥: 영어. 다른 유럽 언어는 모음의 원래 소리를 보존해 왔는데, 16세기에 영어에서 이러난 대모음 추이왜 바뀌었다. 그때 다른 영어 바꿈과 같이, 대모음 추이는 론돈에서 시작하고 밖으로 흘렀다.

흥미롭게도 섭섭하게도, 대모음 추이는 캑스튼이 론돈에서 인쇠 가게를 개업한 순간에 이러나기 시작하고, 캐스터의 맞춤법 기준과 첫 사전의 기준이 벌써 뿌리를 내린 후까지 안 마쳤다. 영어 맞춤법은 영어 발음이 혁신적으로 바뀌기 직전에 얼었다. 그래서 일정한 소리를 적는 맞춤법이 몇 가지도 있고, 많은 낱말이 발음과 맞춤법이 먼다. 대모음 추이 자체만 말고, 맞춤법이 정되자마자 일어난 것도 영문을, 모어 화자에게도 외국어로서 배우는 화자에게도, 배우기 어렵게 만들었다.

16세기 이후 영어는 많은 바꿈을 겪어 왔다. 대영 제국에 의해 미국, 캐나다, 호주, 인도 등 새로운 땅으로 수출되고, 다양한 새 모양으로 진화했다. 모국에서는 r 글자가 발음하지 않게 됐다. 철학이나 화학, 기술 상 혁신이 그리스어와 라틴어 부분으로 만든 새 낱말을 가져왔다. 영국의 식민지들은 자기의 나라가 되고, 그들 중 하나인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유력한 나라가 되었다. 노아 웹스터가 만든 특유의 사전 및 철자법 가지고, 미국 영어는 업계에 출세하려는 사람, 두 다른 언어를 하고 서로 의사 소통을 못하는 사람, 영화나 음악을 즐기는 사람에 의해 배워져 온 세상의 언어가 되었다. 오늘 영어보다는 중국어만 화자가 많이 있는데, 중국인도 영어를 배우고 있다. 이 변동들은 초기 근대 영어를 오늘 쓰는 후기 근대 영어로 흔들고, 붓게 하고, 유선형으로 해 왔다. 하지만 대모음 추이 이후 그만큼 큰 바꿈이 없었다. 그래서 쉐익스피어의 영어가 우리의 영어와 같다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다.

영어의 낱말은 5000년 전 첫 화자들이 사슴을 쫓으면서 유럽을 돌아다닌지 매우 진행해 왔다. 사람의 이동과 충돌은 그 낱말을 새 꼴로 떨어 왔다. 명사의 성 같은 인도•유럽인의 몇 개 유물은 사라졌다. 또 3인칭 단수 -s 어미 같은 몇 개는 겨우 살고 있다. 그리고 대명사 같은 몇 개는 변동도 겪고 보존도 겪어 왔다. 더 이상 thou(네가)와 thee(너를), 그 두 낱말과 you(너), 또는 말할 때 who(누가)와 whom(누구를)를 구별 안 하지만, 아직도 I(내가)와 me(나를), she(그녀가)와 her(그녀를), he(그가)와 him(그를), they(그들이)와 them(그들을)을 구별한다. 영어가 지보화로 돌격을 이끌면서도, 가장 고대의 특징 중 몇 개를 보존한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애착해서 포기할 결심 못해서.

영어가 앞으로 어디로 갈지 누가 아는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신나지 않을까?—우리가 저기로 가져가는 것을 도울 것 정도이다.